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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에게 배우는 투자의 지혜 (6) | 조지 소로스 -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감

조지 소로스(George Soros, 1930~) 하면 가장 먼저 ‘전 세계를 무대로 투기를 일삼는’ 헤지펀드가 떠오를 것이다. 소로스라는 이름과 함께 늘 따라다니는 대표적인 ‘투기극’으로는 1992년 파운드화를 대규모로 매도해 마침내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ank of England)마저 굴복시킨 사례가 손꼽힌다. 당시 소로스는 파운드화 투기로 무려 15억 달러의 투자 수익을 올렸다.

소로스는 또 1997년 7월 태국 바트화의 붕괴로부터 비롯된 아시아 경제위기 때 배후인물로 지목됐을 정도로 ‘약세 통화에 대한 집요한 공격’으로 유명하다. 외환시장이 요동치고 한 나라의 통화 가치가 폭락세를 보일 때면 어김없이 ‘소로스의 망령’이 어두운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소로스의 첫 헤지펀드라고 할 수 있는 퀀텀펀드가 1969년 처음으로 설립돼 초기에 엄청난 수익률을 올릴 수 있었던 밑거름은 다름 아닌 주식시장이었고, 그것도 기술주를 근간으로 한 것이었다.

출범 당시 퀀텀펀드는 운용자산이 400만 달러에 불과했으며, 상장주식 투자 외에도 외환시장과 상품시장에서의 투기적 거래도 실행했다. 헤지펀드답게 선물이나 옵션을 비롯한 파생상품에도 투자했고, 자기자본 외에도 거액의 차입금을 함께 투자해 레버리지 효과를 높이기도 했다. 소로스는 그러나 퀀텀펀드의 주력 투자 대상을 주식으로 삼았다. 특히 당시 한창 인기가 높았던 폴라로이드와 디즈니, 트로피카나, 에이본 등을 공매도(주식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매도 주문을 내는 것)했다. 이들 주식은 1970년대 초까지 ‘니프티 피프티(Nifty-Fifty, 매력적인 50개 종목)’로 불리며 기관투자가들이 가장 선호한 주식이었다. 소로스는 이런 흐름에 맞서 과감히 그 반대편에 섰고, 1973~74년 주가 폭락기에 엄청난 투자 수익률을 올릴 수 있었다.

소로스가 1994년과 1995년 잇달아 엔화 투기에 나서 실패했을 때 퀀텀펀드를 구해준 것도 실은 주식시장이었다. 소로스는 1994년 미국과 일본의 무역협상이 타결되면 엔화가 결국 하락할 것으로 내다보고 엔화를 집중적으로 매도했지만 엔화는 1995년 초 달러당 79엔이라는 사상 최고치까지 치솟았고, 그는 6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1995년 한 해 퀀텀펀드는 39%라는 높은 투자 수익률을 기록했다. 제지회사인 스캇 페이퍼처럼 일시적으로 실적 전망이 불투명해 주가가 급락했지만 곧 실적을 회복할 것이 확실시되는 턴어라운드 기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올린 수익 덕분이었다.


소로스의 재귀성 이론

소로스의 주식시장에 대한 애착은 그의 첫 저서로 1987년에 출간된 그의 첫 저서 《금융의 연금술》에서 잘 드러난다. 소로스는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스가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에서 1930년대의 대공황을 일반 균형 이론에 따라 설명하고 그 처방을 제시했던 것처럼 현대 금융시장의 구조와 운동 법칙을 밝혀내고자 했다. 《금융의 연금술》에서 그가 제시한 재귀성 이론(The Theory of Reflexivity)이 바로 그것이다.

‘시장의 본성 읽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서 그는 1985년 8월부터 1986년 11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전 세계 외환시장과 주식시장, 채권시장, 상품시장을 대상으로 직접 투자한 경험을 소개했다. 그가 실행했던 투자의 핵심은 외환시장이었지만 그 출발점은 주식시장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주식시장은 재귀적 현상을 연구하는 최선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시장은 언제나 옳다’는 통설을 강하게 반박하면서 주가가 내재가치의 반영이라거나, 주가가 결국 내재가치에 수렴해갈 것이라는 명제를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소로스는 재귀성 이론이 현상화돼 나타나는 ‘시장’이 반드시 늘 옳은 것만은 아니며, “시장은 언제나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쳐 있고, 시장이 예측한 사건에 시장 자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정의를 내린다. 이를 주식시장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면 ‘상승하는 주가는 긍정적인 편견에 의해 강화되고, 하락하는 주가는 부정적인 편견에 의해 강화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 역도 존재해 편견이 자기 수정을 통해 주가를 수렴시키기도 한다. 한마디로 시장에는 편견이 존재하며, 이 편견은 자기 강화의 과정을 거쳐 주가와 내재가치의 괴리를 넓히기도 하고, 자기 수정의 과정을 거쳐 그 괴리를 좁히기도 하는데, 두 과정은 서로 끊임없이 새로운 영향을 미친다.

재귀성 이론에서는 이처럼 주가가 수동적 요소가 아니라 능동적 요소인 것이다.


외환시장을 매개로 한 글로벌 투자

소로스가 월스트리트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그의 영향력은 월스트리트는 물론 전 세계 금융시장에 미칠 정도다. 심지어 ‘소로스 이전과 소로스 이후’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석가들도 있다. 이 같은 평가와 영향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무엇보다 소로스는 글로벌 시장을 대상으로 정교한 투기를 하기 시작한 첫 전문 투자자다. 외환시장과 주식시장, 채권시장, 상품시장을 모두 넘나들며 활동한 첫 번째 펀드매니저인 셈이다. 특히 1970년대 초 고정환율제가 붕괴된 뒤 외환시장을 매개로 한 글로벌 투자의 단초를 이끌어냈다.

소로스가 글로벌 투자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수 있었던 바탕은 그의 극적인 삶에서 찾을 수 있다. 소로스는 1930년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부유한 유대인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범으로 체포돼 러시아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 볼셰비키 혁명의 와중에 탈출했다. 또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이 헝가리를 점령하고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자신의 아들을 헝가리 관리의 양자로 입적시켜 수용소행을 피할 수 있게 했다.

헝가리가 공산화되자 1947년 소로스는 영국으로 떠났고, 그 후 런던 정경대학(LSE)에 입학했다. 소로스는 LSE에서 《열린 사회와 그 적들》로 유명한 철학자 칼 포퍼 교수를 만났다. 재귀성 이론으로 발전하게 되는 그의 투자 철학도 이때 정립됐다. 포퍼 교수는 “개방적인 사회를 거부하는 전제적인 이데올로기는 궁극적인 진리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논리적인 오류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인류 사회는 인간이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 때만 진보하며, 궁극적인 진리를 독점할 수는 없다.”고 가르쳤다.

LSE를 졸업한 소로스는 런던의 싱거 앤드 프라이드랜더에 들어가 차익거래를 담당했다. 이는 신주인수권부사채와 같이 권리가 붙은 증권의 가격과 실제 주가의 차이를 이용해 신주인수권만 거래함으로써 차익을 챙기는 것으로 일종의 파생금융상품 거래였다. 1956년 미국으로 건너온 소로스는 F. M. 마이어 앤드 컴퍼니 등에서도 차익거래를 담당했다. 런던과 뉴욕에서 거래되는 유럽계 증권의 가격 차이를 이용해 그 차익을 챙기는 것이었지만, 금리균등세가 도입되면서 이 거래는 중단됐다.


헤지펀드의 역사를 새로 열다

그 후 3년간 철학 공부를 하기도 한 소로스는 1963년 다시 투자사인 아놀드 앤드 S. 블라이크뢰더에 들어갔다. 이 회사는 더블 이글(Double Eagle)이라는 역외펀드를 시작했는데, 1969년 이 펀드의 운용을 맡으면서 그는 역외펀드의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됐다.

1969년 소로스는 짐 로저스와 함께 퀀텀펀드를 설립했다. 400만 달러의 최초 운용 자산 중 25%는 소로스가, 20%는 로저스가 낸 것이었다. 서인도제도의 네덜란드령인 큐라소에 근거를 둔 역외펀드인 퀀텀펀드는 헤지펀드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지만, 설립 초기 직원이라고는 소로스와 로저스, 여비서 한 명이 전부였다. 퀀텀펀드는 1971년부터 일본 주식에 투자했을 정도로 글로벌 투자에 일찌감치 눈을 떴고, 외환시장과 파생금융상품 등에 가리지 않고 투자했다. 특히 기회라고 생각되면 과감히 차입금까지 쏟아 붓는 투자 방식으로 레버리지 효과를 극대화했다. 퀀텀펀드의 투자 수익률은 일반 뮤추얼펀드는 상상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소로스가 사실상 펀드 운용의 일선에서 물러난 1989년까지 20년간 퀀텀펀드의 연평균 수익률은 34%에 달했고, 한 해 100%가 넘는 투자 수익률을 두 차례나 기록하기도 했다.

퀀텀펀드는 이 같은 놀라운 투자 수익률을 바탕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헤지펀드로 성장해 나갔지만, 소로스에게 펀드의 급성장은 새로운 부담이 됐다. 우선 펀드의 대형화에 반대하는 로저스가 1981년 퀀텀펀드를 떠났고, 소로스는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해야 했다. 소로스가 정신과 치료를 받은 것도 1980년대 초다. 특히 1981년에는 23%의 투자 손실을 기록함으로써 펀드 출범 후 최악의 투자 수익률과 함께 많은 투자자들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퀀텀펀드는 그러나 다음해 57%의 투자 수익률을 올리며 부활했고, 펀드 규모는 1983년부터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1987년 10월의 뉴욕 주식시장 대폭락 직전에 소로스는 일본 주식시장의 붕괴를 예측하고 일본 주식을 대규모로 공매도했다. 그러나 뉴욕 증시가 먼저 폭락했고, 그는 10월 16일(금요일) 급락 후 10억 달러를 추가로 투자해 S&P 500 지수 선물을 대규모로 매수했다. 하지만 10월 19일(월요일) 뉴욕 시장이 또다시 폭락했고, 소로스는 결국 보유 주식과 선물을 대규모로 처분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주식과 선물을 처분하자 시장은 다시 반등했다. 1987년 10월의 대폭락장에서 소로스는 8억 4,000만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이는 당시 펀드 전체 자산의 28%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1987년 투자 수익률은 14%를 기록했다.

1992년 영국 파운드화의 하락에 베팅해 15억 달러의 이익을 올린 소로스는 1994~95년 초 엔화에 투자했다가 6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또 1997년 초에는 태국 바트화와 말레이시아 링기트화의 매도 포지션을 취했다가 아시아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몰리기도 했다. 바트화와 링기트화가 폭락한 1997년 하반기에는 오히려 이들 통화를 매수하는 입장이었다는 해명에도 불구하고 소로스는 아직도 이들 나라에서 ‘경제 파탄의 원흉’으로 꼽히고 있다.


스스로의 확신과 판단에 힘을 실어라

퀀텀펀드와 쿼터펀드, 퀘이사펀드 등 세계 최대의 헤지펀드를 일군 소로스는 1989년 동구권의 개방 지원과 미국 등 31개국에서의 자선사업을 목적으로 설립한 개방사회기금(The Open Society Fund)의 관리를 위해 일선 펀드 운용에서 물러나 퀀텀펀드 등의 지주회사 격인 소로스 펀드매니지먼트의 회장을 맡고 있다.

드레이퓨스 펀드 출신으로 소로스의 공식 은퇴 이후 퀀텀펀드를 맡아 10년간 펀드매니저로 일했던 스탠리 드러켄밀러는 소로스가 가르쳐준 교훈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맞느냐 틀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옳았을 때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느냐 하는 것과 내가 틀렸을 때 얼마나 많은 돈을 잃느냐에 대한 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소로스는 특히 어느 하나의 거래에 확신이 서면 최대한 할 수 있을 만큼 하라고 가르쳤고, 또 어떤 거래에서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되면 그때가 바로 레버리지를 써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투자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하고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소로스는 손실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거액의 손실에도 전혀 괴로워하지 않았다. 그의 이 같은 자신감은 한 거래에서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개의치 않을 수 있었던 태도 덕분이다. 한 거래에서 실패하면 다른 거래에서 성공해 만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그 거래를 포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출처 : http://media.miraeasset.com/media.contents.servlet.MediaSvt?mode=originalView&listmode=&media_idx=1229

★ 본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으며, 투자로 인한 손실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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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노우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