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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에게 배우는 투자의 지혜 (5) | 존 보글 - 인덱스펀드의 창시자

존 보글(John C. Bogle, 1929~)은 자신이 운영하는 펀드 회사의 비용을 아끼기 위해 출장을 떠날 때 절대로 항공기 1등석을 타지 않고 이코노미 좌석만 이용하며, 시내에서 이동할 때도 택시 대신 지하철을 타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보글이 정말로 어느 정도 철저한 구두쇠인지 웅변해주는 실화가 있다.

보글이 중요한 투자 관련 미팅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으로 출장 갔을 때의 일이다(당시 그가 회장으로 있던 뱅가드 그룹의 본사는 펜실베이니아 주 밸리포즈에 있다). 미팅 참석을 위해서는 값비싼 플라자 호텔에 묵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호텔 프론트 데스크에 가서 가장 싼 방을 달라고 했다. 호텔 체크인 담당 직원은 이코노미 싱글 룸이 하루 250달러로 매우 저렴하다고 소개했다. 보글은 너무 비싸다며 더 싼 방을 달라고 재차 요구했다.

호텔 직원이 좀더 싼 방을 제시했지만 보글은 계속해서 더 싼 방이 없느냐고 물었다. 직원은 결국 두 손 들었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그럼 예전에 벽장처럼 쓰던 방이 있는데, 창문도 없고 엘리베이터 바로 옆에 있어서 꽤 시끄럽습니다. 하루에 89달러입니다.” 보글은 재빨리 “좋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호텔 직원이 잠시 열쇠를 가지러 간 사이 보글의 뒤에 서 있던 한 신사가 그를 알아봤다. “보글 씨, 맞지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뱅가드 상품들, 진짜 싸더라고요!” 이 신사는 뱅가드펀드의 투자자였다.


저렴한 비용으로 수익 극대화

사실 보글이 1976년 처음으로 인덱스펀드를 출범시켰을 당시 간판이나 다름없었던 뱅가드 500 인덱스펀드에는 1,100만 달러가 투자됐을 뿐이었다. 뮤추얼펀드 업계에서는 유지 비용을 벌기도 어려울 것이라며 대부분 조기 좌초를 예상했다.

그 무렵 뮤추얼펀드 업계에서 주식형 펀드는 사실상 전부 액티브펀드였다. 액티브펀드는 펀드매니저가 자신의 판단으로 그때그때 종목을 교체하면서 적극적으로 포트폴리오를 운용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보글이 수동적으로 시장을 추종하는, 즉 주식시장 전체를 벤치마킹하는 인덱스펀드를 들고 나왔다. 시장에 맞서 이기려 하지 않고 시장을 따라가는 펀드를 내놓은 것이다.

그가 내세운 인덱스펀드의 장점은 단순히 액티브펀드를 역행하는 게 아니라, 수수료를 낮추고 운용 비용을 절약해 펀드 투자자들의 실질수익률을 최대한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창기 뱅가드가 내놓은 펀드들은 ‘콘도르 펀드(초원에서 동물들의 썩은 시체나 뜯어먹는 콘도르에 비유한 말)’로 폄하되기도 했다. 그러나 보글은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인덱스펀드를 운용했고, ‘고객에게 최대한의 이익을 돌려준다’는 신념을 실행에 옮겨 투자자들을 끌어모았다.

현재 뱅가드 500 인덱스펀드의 운용 자산 규모는 1,000억 달러를 넘어서 피델리티 마젤란펀드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펀드로 자리매김했다. 자산 규모뿐만 아니라 수익률에서도 마젤란펀드를 멀찌감치 앞서 나갔다. 1995년 이후 10년간 누적 수익률을 보면 마젤란펀드는 163.23%에 그친 반면, 뱅가드 500 인덱스펀드는 210.49%의 수익률을 올려 무려 47.26% 포인트나 차이가 났다. 또 뱅가드 그룹의 전체 자산 규모도 5,000억 달러가 넘어 피델리티에 이어 세계 두 번째의 펀드 회사로 부상했다.

인덱스펀드가 갖는 이점은 두 가지다. 첫째는 장기적으로 우수한 투자 수익률을 올려준다. 채권이나 현금을 보유하는 것보다 주식에 투자하는 게 장기적으로 투자 수익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둘째는 장기적으로 시장 평균에 근접한 우수한 수익률을 ‘안심하고’ 기대할 수 있다.


허황된 욕심? 현실적인 수익!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창기 시절 인덱스펀드가 액티브펀드에 비해 인기를 끌지 못했던 이유는 시장 흐름만 쫓다 보면 시장 평균을 초과하는 뛰어난 투자 수익률을 거둘 수 없을 것이라는 개인투자자들의 과도한 욕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와 1990년대 미국의 주요 액티브펀드들 가운데 S&P 500 지수를 벤치마킹하는 인덱스펀드보다 높은 투자 수익률을 올린 경우는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결국 액티브펀드 열 개 중 아홉 개는 인덱스펀드에 뒤졌다는 말이다.

보글은 “인덱스펀드는 파는 게 아니라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뱅가드는 그 흔한 방송 광고도 하지 않는다. 투자자가 제 발로 찾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인덱스펀드는 또한 펀드 운용 수수료가 저렴하다 보니 운용사에게 돌아가는 이윤이 적다. 보글이 그렇게 비용을 줄이는 데 악착같은 또 하나의 이유다.

보글은 많은 사람들이 인덱스펀드를 기피하는 가장 큰 이유가 희망이 너무 크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좋아 보일 때조차도, 돈을 벌 확률이 90%라고 해도 이런 확률에 기대서는 안 된다고 그는 말한다. 확률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고, 수학적인 통계가 생명을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10%의 확률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돈을 모두 잃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미국 주식시장이 대폭락했던 1929년 뉴저지 주 베로나에서 태어난 보글은 프린스턴 대학교 재학 시절부터 일찌감치 뮤추얼펀드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가 1951년 대학교 졸업논문으로 쓴 <투자회사의 경제적 역할>은 당시 일반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뮤추얼펀드의 발전 가능성을 예견한 탁월한 논문으로 손꼽힌다. 대학 졸업 후 야간과 주말을 이용해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을 마친 그는 당시 펀드 업계의 거물이었던 월터 모건이 이끄는 웰링턴 매니지먼트 컴퍼니에 입사했다.

보글은 웰링턴 매니지먼트에서 뛰어난 실적을 기록하며 회장 자리까지 오르지만 인수합병 문제로 인한 갈등으로 사표를 내고 1974년 뱅가드를 설립했다. 보글이 붙인 ‘뱅가드’라는 회사 이름은 나폴레옹 함대를 궤멸시킨 넬슨 제독의 영국 함대에서 따온 것이다. 뱅가드 함대가 한 척의 배도 잃지 않고 역사적인 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둔 것처럼 투자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남기겠다는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1996년 존 브레넌에게 뱅가드 그룹 회장을 물려주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보글은 2000년 그 자리에서도 물러나 현재는 뱅가드 그룹 산하의 보글 파이낸셜 마켓 리서치 센터 사장을 맡고 있다. 그는 여전히 뮤추얼펀드 산업과 인덱스펀드의 미래를 내다보는 강연과 저술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으며, 2004년에는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뽑히기도 했다.

끝으로 보글이 한 인터뷰에서 들려준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옛날 아랍에 압둘 라파드라는 족장이 살았다. 그는 수년간 세상을 샅샅이 뒤지며 값비싼 다이아몬드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끝내는 찾지 못하고 절망에 빠져 죽고 말았다. 얼마 뒤 후계자가 그의 집 뒷마당에서 말을 산책시키다 목이 말라 마당에 있는 작은 샘물에서 물을 마셨다. 그런데 검은 돌덩이가 눈에 띄었다. 흙을 파보았더니 진귀한 금강석 암반이었다. 압둘 라파드 족장이 그토록 찾으러 다녔던 값비싼 다이아몬드는 바로 그의 집 뒷마당에 무진장하게 파묻혀 있었던 것이다.”

출처 : http://media.miraeasset.com/media.contents.servlet.MediaSvt?mode=originalView&listmode=webzineList&media_idx=1228

★ 본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으며, 투자로 인한 손실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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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노우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