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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에게 배우는 투자의 지혜 (7) | 피터 린치 - 전념, 전념, 전념

“자신이 매수한 주식과 쉽게 헤어지는 이유는 믿음의 기반이 약하기 때문이다. 주식투자도 남녀의 사랑이나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현명하게 선택했다면 헤어질 이유가 없다.”
월스트리트 역사상 가장 성공한 펀드매니저이자 마젤란펀드를 세계 최대의 뮤추얼펀드로 키워낸 피터 린치(Peter Lynch, 1944~)의 말치고는 너무나 쉽고 당연하며 또 상식적인 말이다. 하지만 많은 투자자들이 이를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월스트리트 최고의 펀드매니저

린치는 1977년부터 1990년까지 피델리티 인베스트먼트의 마젤란펀드를 운용하면서 숱한 기록을 남겼다. 무엇보다 그가 펀드매니저를 맡은 13년간 마젤란펀드의 연평균 투자 수익률은 29.2%에 달했다. 린치가 펀드매니저를 맡은 1977년 5월 마젤란펀드에 1만 달러를 투자했다면 그가 마젤란펀드를 떠난 1990년 5월에는 27만 달러로 늘었다는 계산이다. 월스트리트의 숱한 펀드매니저들 가운데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렇게 꾸준히 시장 수익률을 훨씬 상회하는 투자 수익률을 올린 경우는 린치와 워런 버핏을 제외하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피터 린치는 마젤란펀드를 맡은 게 펀드매니저로서의 첫 출발이었다. 그는 1969년 피델리티에 금속 업종 리서치 애널리스트로 입사해 투자업계에서 8년간 경험을 쌓았지만 펀드를 직접 운용한 것은 마젤란펀드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운용 첫 해부터 놀라운 투자 수익률을 올렸다. 그가 펀드 운용을 맡은 뒤 첫 결산기였던 1978년 3월 말 마젤란펀드의 투자 수익률은 20%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다우존스 평균 주가는 17.6%나 떨어졌고 S&P 500 지수도 9.4% 하락한 것과 비교하면 그가 펀드매니저로 첫발을 내디딘 해의 투자 수익률은 정말로 놀라운 것이었다.

마젤란펀드의 이 같은 높은 수익률 행진은 계속 이어졌고, 덕분에 마젤란펀드도 존폐의 기로에서 벗어나 일약 세계 최대의 뮤추얼펀드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가 펀드매니저를 맡은 1977년 5월 마젤란펀드의 운용자산은 1,800만 달러에 불과했다. 1981년까지 4년간은 일반인에게 판매되지도 않았다. 마젤란펀드는 피델리티의 다른 군소 펀드와 합병하면서 1981년 자산 규모를 1억 달러로 키웠지만, 이 정도 운용자산은 당시 미국 내 주식형 뮤추얼펀드 가운데 최하위 20%를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이런 마젤란펀드였지만 린치가 은퇴할 무렵에는 120억 달러로 그 규모가 불어났다. 단일 뮤추얼펀드로는 처음으로 운용자산 100억 달러를 돌파했고, 마젤란펀드에 투자한 주주도 100만 명을 넘어섰다. 린치는 또 마젤란펀드를 운용하면서 무려 1만 5,000개에 이르는 종목의 주식을 매수했고, 운용 기간 중 마젤란펀드의 평균 편입 종목 수는 1,400개에 달했다. 물론 이 가운데는 포드자동차, 크라이슬러, 보잉, 코카콜라, 펩시콜라, 필립모리스 같은 대기업 주식도 있었지만 토이저러스, 던킨도너스, 팹보이스, 타코벨, 샵앤샵같이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주식이 훨씬 더 많았다. 이들 주식은 사실 그가 발굴해 높은 수익을 올림으로써 일반 투자자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더구나 그는 멕시코 전화회사(TELMEX) 같은 외국 기업도 발굴해 과감하게 투자했다. 마치 거대한 고래가 엄청난 양의 작은 물고기를 빨아들이며 생활하듯이, 마젤란펀드도 주식시장이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다양한 주식들을 섭렵한 셈이다. 좋은 주식을 고르기 위해서는 많은 기업을 연구•조사해야 한다는 그의 투자 철학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최고의 투자 수익률을 올려줄 ‘성공주’를 발굴해내는 것은 마치 바위 아래 숨어 있는 벌레를 찾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10개의 바위를 들추어내면 벌레 한 마리를 찾아낼 수 있지만 20개의 바위를 들추면 두 마리의 벌레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린치는 1944년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아일랜드계였던 그의 아버지는 보스턴 대학교 수학과 교수였지만 그가 일곱 살 되던 해에 암 판정을 받고 3년 뒤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고등학생 시절부터 골프장의 캐디로 일했는데 이곳에서 주식시장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의 첫 주식투자도 실은 캐디로 번 돈 1,250달러로 항공 운송 회사인 플라잉 타이거 라인의 주식을 매수한 것이었다. 그가 주식을 매수했던 1960년대 초는 일본을 비롯한 태평양 연안 국가의 경제 발전이 비로소 본격화되던 무렵이었고, 플라잉 타이거의 전망은 매우 밝았지만 주가는 10달러에 불과했다. 그의 첫 투자는 성공했다. 그는 이 주식을 판 돈으로 대학원 학비를 댈 수 있었다. 그는 플라잉 타이거가 패더럴 익스프레스에 인수된 1989년에야 처음 매수했던 주식을 전부 처분했다.

보스턴 대학교 재학 중에도 캐디로 일하며 장학금을 받았던 린치는 당시 피델리티의 사장이었던 조지 설리반의 캐디를 한 게 인연이 돼 피델리티에서 여름방학 중 인턴 직원으로 일했다. 린치는 1968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에서 MBA를 받은 뒤 1969년 피델리티에 리서치 애널리스트로 입사했다. 1977년 마젤란펀드를 맡기 이전까지 그는 금속, 화학, 섬유 등 다양한 분야의 산업을 담당했는데, 이런 경험은 그가 펀드매니저로 활동하는 데 좋은 토양이 됐다.


폭락장에서 피어난 피터 린치의 신화

하지만 그가 펀드매니저로 출발하던 무렵의 주식시장은 1972~74년의 주가 폭락 여파로 인해 황폐해진 상태였다. 특히 뮤추얼펀드 업계는 신규 고객은커녕 기존 가입자도 펀드를 해약하는 상황이어서 고사 직전이었다. 1963년 처음으로 조성된 마젤란펀드 역시 1966년 2,000만 달러에 달했던 운용자산이 1976년에는 600만 달러까지 줄었다. 이 정도 규모로는 펀드매니저의 인건비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피델리티는 결국 마젤란펀드를 에섹스펀드(이 펀드는 운용 과정에서 큰 투자 손실을 입어 세금 혜택을 볼 수 있었다)와 합병해 운용자산 규모를 1,800만 달러로 키우고 린치에게 운용을 맡겼다. 마젤란펀드와 린치의 신화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린치는 기본기를 가장 중시한다. 그의 투자 방식은 매우 쉽고 상식적이다. 또 그의 말은 무척 간결하다. 하지만 잘 음미해보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사람들은 주가가 어떻게 움직이는가에만 몰두할 뿐 막상 그 기업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시시각각 변하는 주가 움직임을 안다고 해서 주식투자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린치는 1990년 5월 31일 마젤란펀드를 떠났다. 그가 펀드매니저를 맡은 지 정확히 13년 만이었다. 물론 그 후에도 그는 피델리티 인베스트먼트의 광고에 등장해 이 회사의 얼굴 역할을 해왔고, 현재 피델리티 매니지먼트의 리서치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린치가 마젤란펀드를 떠난 지 벌써 20년이 가까워오지만 그가 만들어낸 숱한 기록들은 아직도 월스트리트의 신화로 남아 있다.


전설이 된 린치의 은퇴

린치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가운데 하나는 그가 마젤란펀드를 운용한 기간 동안 마젤란펀드는 단 한 번도 투자 수익률 상위 15위 안에 들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 해 한 해의 성적만으로는 그의 운용 실적이 두드러질 정도로 화려하지는 않았다는 말이 된다. 더구나 린치가 순수하게 펀드매니저로 일한 것은 마젤란펀드를 운용한 13년이 전부다.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펀드매니저로서 신화를 남겼고, 은퇴한 이후에도 월스트리트에서 여전히 최고의 펀드매니저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린치는 마젤란펀드를 떠난 지 3년 만인 1993년에 쓴 《피터린치 주식투자》 서문에서 자신이 왜 마젤란펀드를 떠나게 됐는지 솔직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때까지도 그는 마음속에 ‘주식에 대한 강한 욕망(lust for stocks)’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46세의 나이로 월스트리트 최고의 펀드매니저가 되었으면서도 린치는 스스로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바로 ‘가족들과의 소중한 시간을 위해서’다.

린치는 2,000개 종목의 티커(미국의 주식 종목 코드)를 외우고 있으면서도 세 딸의 생일 날짜는 잊어버리고, 18개월간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못했으며, 2년 동안 미식축구 경기를 한 차례도 구경하지 못했다고 린치는 고백한다. 더구나 그때 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와 같은 나이였다.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이 더욱 와 닿았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됐다는 것이다.

린치가 마젤란펀드를 떠나기로 하자 피델리티의 네드 존슨 회장은 그에게 1억 달러 규모의 작은 펀드를 운용할 것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그는 거절했다. 또 폐쇄형 뮤추얼펀드인 린치펀드를 만들어 주식시장에 상장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린치펀드를 주식시장에 상장하게 되면 펀드의 존속은 보장되는 셈이고, 그의 이름을 붙였으니 20억 달러 정도는 들어올 것이며, 한 해 최소한 0.75%의 운용보수만 받아도 1,500만 달러의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더구나 그는 펀드 운용의 큰 흐름만 관리하고 실제 운용은 다른 펀드매니저에게 맡기면 가족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거액의 돈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린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펀드매니저는 펀드 규모와 관계없이 운용에 전념해야 하고 자신의 주식은 자신이 직접 골라야 한다는 게 그의 투자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수백 명의 애널리스트와 다른 직원의 도움이 있다 해도 결국 투자와 관련된 최종 결정은 펀드매니저 자신이 내려야 하며, 이런 결정을 위해서는 모든 시간을 기업 연구에 쏟아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월스트리트가 그를 최고의 펀드매니저로 손꼽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소신 때문일 것이다.


최악의 업종에 속한 최고 기업에 투자하라

린치는 영업 실적이 극적으로 변화하는 소위 ‘턴어라운드 기업’을 찾아내는 데 기업 분석의 궁극적인 목표를 두었다. 그의 투자 전략은 이런 기업을 찾아내 영업 실적이 호전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에 앞서 1차로 주식을 사들이고, 실제로 실적이 호전되면 추가적으로 주식을 더 매수한 다음, 이런 실적이 주가에 충분히 반영된 다음 매각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마젤란펀드는 세계 최대의 뮤추얼펀드였지만 그의 매매 규모는 한 번에 1만 주를 넘는 경우가 드물었고, 펀드의 회전율도 비교적 높았다. 그래야만 특정 종목의 주가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주식을 매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기업 조사와 방문을 통해 수많은 투자 후보 기업을 찾아냈다. 충분히 많은 기업을 대상으로 충분히 조사하면 비록 현재 드러난 영업 실적은 좋지 않더라도 실적이 극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턴어라운드 기업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어떤 업종에 대해 투자자들 대부분의 의견이 더 나빠지고 있다고 할 때까지 기다려라. 그리고 그때 그런 업종에서 가장 뛰어난 기업의 주식을 사라.”

출처 : http://media.miraeasset.com/media.contents.servlet.MediaSvt?mode=originalView&listmode=webzineList&media_idx=1512

★ 본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으며, 투자로 인한 손실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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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노우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