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4

« 2025/4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블룸버그&실시간 지수     FX News     forexfactory.com     통계지표     네이버 뉴스     다음 뉴스     전자공시

“미국에서 최악의 대통령은 누구인가.”

프린스턴 대학 내의 조그마한 파티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불법 도청으로 하야한 리처드 닉슨이 유력한 후보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질문을 받은 미국인들의 답변은 의외의 인물로 통일됐다. 1930년대의 허버트 후버였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1929년, 미국에는 대공황이 밀어닥쳤고 그 결과로 미국 유권자들은 상대 당 루스벨트의 4선 연임을 선택했었다.

조지 워싱턴 이래 삼선불가의 관행을 소중히 여기던 미국인들이 4선 대통령을 탄생시킬 정도로 경제위기는 정치적 분노를 폭발시켰다. 수 십 년 세월이 흐른 후의 조촐한 자리에서도 20대와 50대가 세대 차이를 불문하고 어렵지 않게 ‘최악의 대통령’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운이 없었던 사람”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했다.


1929년의 공황이 더욱 심각해진 하나의 원인은 지금과 같은 경제지표가 없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각국 정부와 경제학자들은 분기별 국내총생산(GDP)의 변동을 살펴가며 잘못된 경제 구조를 고쳐나가는 일을 한다. 그러나 1930년대 미국에는 이런 분석기법이 없었다. 나중에 개발된 국민계정을 이미 지나간 이 때 미국 경제에 적용해 보니 국민총생산이 50%나 감소했다는 결과도 나왔다고 한다.

한국에서 경제위기가 발생할 때의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후버의 경우 취임하자마자 공황이 닥친 반면 김 전 대통령은 임기 2년의 호황, 2년의 불황 마지막 1년의 위기를 맞았으니 더더욱 누구 핑계를 대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한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이라고 못 박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나라에는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해 200여명을 사살한 대통령도 있고 한 도시를 완전 봉쇄해 무차별 학살을 저지르고 취임한 대통령도 있다.

이렇게 근본 결격사유를 안고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 대통령 가운데라면 과연 김영삼이 최악일까. 사실 이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그게 주요 논점은 아니다.

1997년 경제 위기, 과연 누구 탓이었나. 이것을 논하려다 보니 당시의 김영삼 정권에 대한 얘기가 당연히 끌려 들어오는 것 뿐이다.

외환위기를 초래한 원인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어떤 이들은 굳이 외국 투기 세력의 농간만을 강조하려고 한다. 이들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그리 잘못한 게 없는데 운이 없었을 따름이란 것이다.

하지만 투기 세력과 같은 하이에나들은 절대로 멀쩡한 경제를 건드리지 않는다. 장난을 쳤을 때 재미를 볼 만한 취약구조가 있는 국가를 공격한다. 그래서 국제 투기세력은 오히려 경제 원칙의 집행자라는 관점도 있다.

여러가지 원인이 이리저리 얽혀 있지만 그 가운데 굵직한 것들을 시간의 역순으로 돌이켜 보려고 한다.

1. 1997년 3월: 다른 누구를 절대 탓할 수 없는 외환시장 대책의 대참사.

누구도 부인못할 명백한 정책 실수다. 대폭발에 이어 연쇄폭발로 이어지고 있는데 안전한 곳에 있던 폭약까지 일부러 던져 넣은 격이다.

이미 한국 경제는 전 세계 알만한 하이에나들이 다 군침을 삼키며 흘겨보는 중이었다. 이 때 일부러 몸에 상처를 내서 피 냄새를 풍겨가며 전 세계 초원의 사냥꾼들을 몽땅 불러들인 것이 1997년의 선물환 개입 정책이다.

국가가 얼마나 위기에 처해있는지 조차 모르는 정책 당국자들의 오기가 얼마나 한심한가를 여실히 보여준 교훈이다. 최근의 환율 주권론을 들을 때마다 11년전의 어리석음이 강하게 연상된다.

[관련 시리즈 17] 한국, 마침내 하이에나들에게 피의 초청장을 발송하다

2. 1996년: 무더기 종금사는 누가 풀어줬나

한국에서 뇌관이 터질 경우 동남아시아 등 제 3 세계에 태산처럼 쌓여 있는 온갖 폭발물까지 연쇄 반응하도록 연계 고리를 놓은 것이 종금사 난립이다.

1995~1996년 무려 30여개의 종금사가 일거에 난립해 문란한 외환관리의 극치를 드러냈다. 이들 종금사는 선진국의 단기 자금을 빌려 개발도상국의 부실채권에 쏟아 부었다.

종금사들이 미국 금융기관 돈을 바로 빌리기 어려우면 신용도 높은 국내 은행들이 중간에 나섰다.

외환위기는 한국에 앞서 동남아시아 국가들부터 강타했다. 한국의 차례가 됐을 때 우리가 회수할 수 있는 돈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누가 어떻게 해서 마구잡이로 종금사 설립 허가를 내줬는지 사법 당국마저 나섰지만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 없이 외환위기 11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관련 시리즈 8] 소개팅에 나갔다가 종금사 미녀들에게 야단을 맞다

1번과 2번, 이 두 가지 원인만큼은 김영삼 정권이 절대 그 누구에게도 핑계를 돌릴 수 없는 분명한 관리 부실이다. 정권이 책임져야 할 또 한 가지가 있다.

3. 1995년: 반도체의 착시, 1996년: 사상최대 무역적자

1996년의 사상 최대 무역적자는 한국 경제의 체력을 고갈시켰다. 위기 발생에 앞서 면역능력부터 떨어졌던 것이다.

1995년만 해도 1달러당 300원 시대를 대비하자는 성급한 분석까지 나왔었다. 반도체 단일 품목의 호황이 빚어낸 착시였다.

반도체 착시는 김영삼 정부에서 조금씩 준비해가던 구조조정의 필요성까지 무시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1996년 상황이 돌변했다. 달러의 수급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다.

사상 최대 무역적자가 서민의 체감경제에는 아직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외환시장은 이미 바싹 말라버린 달러 기근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820, 840 선이 차례로 무너지는 가운데 일선 외환시장의 딜러들은 이미 예사롭지 않은 현상을 목격하고 있었다. 다만 그게 위기를 알리는 전령이란 것을 몰랐을 뿐이다.

[관련 시리즈 4] 1995년의 그 해 한국 경제는 정말로 독보적이었다
[관련 시리즈 11] 두달 넘게 사수한 820고지의 갑작스런 붕괴
[관련 시리즈 12] 시위 진압을 꼭 빼닮은 외환시장 개입
[관련 시리즈 14] 조자룡 헌 창 쓰듯, 한국은행 달러를 쓰다


외환위기의 원인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한보 기아 등 재벌들의 연쇄 부도다. 이 원인은 과연 당시 정권의 전적인 책임인가.

4. 한보, 기아 그리고 은행...

1997년 들어 재벌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재벌 하나 부도났다고 해서 정권이 책임 질 일은 아니었다.

무너질 기업은 무너져야 한다. 그래야 살아날 기업이 살아난다.

문제는 경제가 함께 붕괴됐다는 것이다. 사라져야 할 때 사라지지 않고 불법을 불사하며 생존한 기업은 그대로 폭약물질로 변모해 있었던 것이다.

기아의 경우는 삼성자동차라는 교란 변수까지 작용하고 있었다.

[관련 시리즈 12] 무서운 단어는 3월 한국은행 보고서에 이미...

재벌이 무너졌다고 국가 경제도 함께 무너지는 이런 구조. 이것은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5. 김영삼 아니라 그 누군들 ‘대마불사’의 원죄를 풀었을까

한국 경제는 어떻게 해서 그토록 엄청난 폭약을 끌어안고 있었을까.

바로 은행이 안고 있던 불량 재벌대출이다.

일이 터지고 나니 대기업에 나간 대출이 전부 부실요인이 됐다.

엘리트 기업을 중심으로 자원을 자의적으로 배분하고 고도성장을 추진한 한국 경제다. 최소한 자본자유화에 임하는 1990년대부터는 구조조정에 착수해야만 했다.

이 문제에 관한 김영삼 정권의 책임이라면 앞선 정권이 저지른 폐해를 청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폭발물을 누적시킨 이전 정권의 책임은 어디까지 물어야 하나.

1960~70년대 고도성장의 공과 과를 함께 논의하게 되는 문제다.

[관련 시리즈 19] 독재자 박정희와 전두환은 외환위기와 무관한가

또한 이게 단순히 위정자들만의 문제였을까.

1990년대 은행권 풍속도다.

대출의 중도상환을 원하는 모 재벌 임원이 은행 부부장으로부터 ‘꾸중(?)’을 듣고 있다.

“당신들이 오늘날 대재벌이 된 게 누구 덕분인데 배은망덕하게... 중도 상환하고 싶으면 당신네 계열사 뿐만 아니라 그룹 전체 다 상환 해야 된다고 회장한테 보고해!”

재벌들이 은행돈을 싹쓸이하기도 했지만 은행부터 재벌에게만 쏟아 붓던 시절이다.

6. 1989년, 중앙은행을 동원한 위험한 장난

시리즈에 언급하지 않았지만 1989년 노태우 정권 시절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한 증시부양 또한 외환위기와 떼 낼 수 없다.

1998년 이후 외환위기 수습이 결실을 보려고 할 때마다 1989년 증시부양에 동원된 투신사 부실 문제가 돌출해 위기 극복에 찬물을 끼얹은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중앙은행 발권력을 동원한 증시부양. 전 세계가 연구대상으로 삼을 만한 ‘반 미친 짓’이었다.

7. 영어도 못하면서 기내식 먹는 맛에 국제부서 눌러 앉던 금융인들

은행 국제부서는 각별한 인연이 없으면 가기도 어려웠다. 지금 당장 거래에서 수익을 내는 것보다 임원 부장들의 든든한 신임을 얻는 것이 자리를 지키는데 더 중요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새옹지마의 교훈은 여기서도 적용된다.

외환위기 이후 외국 금융자본들이 들어오면서 오히려 ‘음지’라고 하던 국내 채권 주식 분야가 각광을 받고 금융 스타들을 쏟아냈다.

8. 내 빚은 네 빚, 네 빚은 내 빚

외환위기의 가장 큰 피해는 바로 서민 가계 파탄이다. 한 집이 망하면 옆집도 망하는 연쇄 파탄은 한국인의 온정주의가 큰 몫을 차지했다.

이른바 맞보증으로 대출과 보증을 주고받은 사람이 직장마다 가득했다.

내 빚 다 갚아도 남의 빚 보증 선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현실인데도 불구하고 국제통화기금(IMF)의 고금리 처방을 받아들이고 또 정치적 목적으로 특정후보의 재협상 주장까지 헐뜯어 댄 것은 천년의 한이 남을 일이다.

[관련 시리즈 22] 너무나 아쉬운 10년전 DJ의 재협상론

은행은 재벌에 묻지마 대출. 서민은 이웃끼리 맞보증. 외환위기라는 괴물이 이토록 군침 넘치고 맛 나는 음식을 넘겨둘 리 있었을까.

그렇다고 이렇게 서민들의 취약한 심성을 들추는 게 당시 집권자들의 면피를 돕기 위해서가 절대 아님을 밝혀둔다.

민간에 뿌리 깊게 박힌 무력한 온정주의 또한 군사 독재 시절 이래의 불순한 대중통제와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장경순 경제전문기자 
똑똑한 국민은 통치하는데 매우 불편한 존재다. 하지만 깨어 있는 서민이야 말로 정권의 파국을 막아주는 최고의 예방주사다.

1997년 외환위기는 한국 사회의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정권만 바뀐게 아니다. 우리가 믿어왔던 모든 것이 개혁 대상이 된 가운데 지배 엘리트의 교체가 사회 전부문에서 벌어졌다. 50년동안 흐름이 없던 사회에 자극을 준 것은 불행 속의 순기능이었다.

10년전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어떻게든 전달해야겠다는 의무감으로 시작하다보니 1년이 넘었다.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는가 조차 확신이 서지 않는 가운데 이제 이 시리즈를 마무리한다.

장경순 경제전문기자

장경순 (kschang@dailyseop.com) 기자 데일리 서프라이즈


★ 본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으며, 투자로 인한 손실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
Posted by 스노우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