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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의 합리적운용의 조류

투자기법은 정보·통신 등의 기술혁신과 깊은 연관성이 있으며, 그것을 토대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일례를 들면, 19세기 초에 뉴욕 등 미국 각지에 증권거래소가 설립되었다. 각 거래소에서는 그 지방의 종목을 중심으로 그 지역의 투자자를 중심으로 매매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화를 비롯한 19세기 후반의 통신혁명을 토대로 뉴욕거래소에 전 미국의 거래가 집중되기 시작했다. 기술의 진화에 따라 뉴욕시장이 전 미국의 투자가가 미국의 전 종목을 거래하는 시장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19세기 말경에 뉴욕거래소는 '빅 보드(Big Board)'라고 불리게 되었다.

1920년 미국에 라디오 방송이 개시되었다. 1925년에는 실용 텔레비전이 발명되었고 1927년에는 린드버그가 태평양을 비행 횡단하였다. 그리고 자동차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매우 큰 격동의 20세기(Rolling Twenties)였다. 정보의 전달 속도와 범위가 크게 개선되었고, 더욱 더 발전될 것이 확실시되는 시기였다. 주식시장에서도 각종 루머와 정보가 상승세를 부추겼다. 그러나 1929년 버블이 해소되는 대폭락이 발생하였다.

시장의 폭락은 금융제도와 투자기법·투자이론의 변혁을 가져왔다. 1929년의 대폭락 이후 증권거래법, 투자자문법 등의 많은 법률이 제정되었고, SEC도 증권거래소법에 따라 설립되었다. 그레함이 기본적인 분석의 고전적 명저인 「증권분석」을 출간하였고 윌리엄스가 「배당할인모델」을 발표하여 오늘날 증권분석의 기초를 만들었다. 종래의 수급상황이나 루머에 따라 변동하던 주식이 증권분석기법에 의한 실제가치의 판단에 따라 매매되었다.

1941년에는 미국에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었다. 나아가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 컴퓨터와 트랜지스터의 개발이 진행되어 정보처리속도가 현저히 개선되었다. 1950년대의 마코위츠로 대표되는 현대투자이론(MPT)의 전개는 이론적인 인프라스트럭처(infra structure)를 제공해 주었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승국인 미국의 화려한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뉴욕거래소를 중심으로 시민 자본론(Peoples Capitalism)이 제창되었고, 때마침 노동조합의 공세에 따라 기업연금제도 붐(Pension Drive)이 일어났다. 특히 1950년에 발족한 GM의 기업연금은 주식을 중심으로 운용하기로 노동조합과 합의를 하였다. 전후의 번영과 연금을 중심으로 한 자금이 서서히 주식투자의 증가를 가져왔다. 전후에 대학교육을 받은 젊은사람들이 투자업계에서 활약하기 시작하여, 자신에 가득찬 성장주이론을 내 놓았다. 그러나 50년대 중반경에는 주식투자수익률이 채권수익률을 하회한다는 '수익률혁명'이 제기되었다.

1964년 미국에서 텔레비전 보급률이 90%를 넘어섰고 같은 시기에 샤프의 CAPM이 발표되었다. CAPM의 탄생 배경에는 텔레비전의 보급이 급속하게 진행되어 정보전달 속도의 고속화가 발단이 되었다는 시대배경이 있었다. 1960년대에는 우주기술이 크게 발전되었다. 1969년의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으로 상징되는 일련의 기술개발은 시스템공학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시스템공학이라 불리는 기술이 금융투자분야에도 활용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상당수의 NASA 기술자들이 금융투자업계에 참여하여 포트폴리오 관리를 시스템 공학적으로 접근하는 시도를 하였다.

1960년대 전반의 주식시장은 황금의 60년대라고 불릴 정도로 화려하였다. 특히 뮤츄얼펀드의 붐과 상당수의 성장주가 활약하였다. 그러나 60년대 후반이 되면서,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경기침체, 사회복지투자에 대한 쇠퇴 등으로 미국경제도 점차 침체기에 접어 들면서, 주식시장도 전체적으로는 박스장세가 지속되었다. 다만 Nifty-Fifty(우수한 50종목)라 불리는 일부 종목의 상승만이 두드러졌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까지는 규모가 확대된 연금운용에 있어서 여러 가지 운용측면에서 개선이 있었다. 위험과 수익의 관계를 중시하게 되었고, 시간가중 수익률의 사용, 운용기관의 확대 등도 행해졌다. 동시에 은행, 보험, 투자자문 등이 생겨나서 연금자산을 두고 경쟁이 매우 치열해졌다. 투신과 연금의 자산증가를 배경으로 기관화 현상이 현저하게 나타났고, 기관투자가는 Nifty Fifty에 투자를 증가시켰다. 그 후 1973년 제1차 오일쇼크로 주식시장은 폭락하게 되었다.

1929년처럼, 폭락은 다시 한번 여러 가지 면에서 시장의 변혁을 가져왔다. 1975년 주식수수료의 자율화가 행해졌고 그 이후 70년대를 통해서 주식시장에서는 매매시스템이나 파생상품 거래의 도입 등 시장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수단이 강구되었다. 연금운용에 있어서는 1974년에 ERISA법이 제정되어 연금 컨설턴트가 급증하였고 투자성과 측정이 본격화되었다. 투자이론 측면에서도 에리스의 '패자게임'론이 발표되어 인덱스운용 붐의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는 PC가 보다 우수해지고 저가에 보급되었다. 이에 따라 정보전달과 처리속도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시장정보의 파급속도가 지금까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속화되고, 세계 어디서나 정보 입수가 가능하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 80년대는 금융시장의 규제완화, 자유화가 진행되었던 시대였다. 때마침 세계적으로 주식 붐이 일어났고 세계시장의 연결이 급속히 진행되었다. 연금기금의 규모는 더욱 증대되었으며, 여러 가지 조사에 의해서 소극적운용의 우수성이 나타나던 시기였다. 1987년에는 블랙 먼데이(Black Monday)가 발생하였고, 그 후 발표된 프레디 보고서에 의하면 시장을 통일해야 한다는 중요성이 다시 한번 제기되었다.

90년대 들면서 정보통신기술의 획기적 발달로 국제금융시장이 단일화되자 개인투자자들의 힘은 잃은 대신에 개인들의 돈을 기금형태로 모아 전문적으로 투자하는 헤지펀드가 각광받기 시작했다. 이들 헤지펀드는 최소의 위험으로 가능한 한 많은 투자수익을 내야 하기 때문에 파생금융상품이 동원될 수밖에 없었다. 파생금융상품은 국제 금융시장에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각종 펀드메니저와 브로커, 심지어는 개인투자자들도 정확하게 계산된 옵션을 활용함으로서 예상치 못한 가격등락에 따른 피해를 상쇄할 수 있었다.

국제 금융시장에서는 유동성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며 투자업계는 한 단계 도약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 후유증도 만만치 않아 233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영국의 베어링(Baring)은행이 문을 닫는 데에는 수개월도 채 걸리지 않았고 노벨 경제학 수상자와 하버드대 교수 등 쟁쟁한 경제이론가를 영입해 한때는 엄청난 수익을 올리며 월가의 부러움을 샀던 세계 굴지의 헤지펀드도 하루아침에 없어졌다.

출처 : http://bbs.kiwoom.com/ivsthelp/StockStory2/allbody.jsp?num=33&tnum=66


★ 본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으며, 투자로 인한 손실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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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노우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