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 4대의혹의 하나 읽어볼만한글/이현2008. 4. 13. 18:22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증권거래가 시작된 것은 56년 3월 3일 증권거래소(당시 대한증권거래소)가 출범하고 나서다. 개장 초기의 증권시장은 주식거래가 전체거래대금의 15%내외 수준이고 나머지 85%이상은 국채위주의 매매로서 이러한 채권중심의 증권시장 운용은 6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 이는 상장기업이 5개 시중은행과 한전주, 대증주, 종금주 등 10개밖에 되지 않았으며, 주식이라는 개념도 일반인에게는 생소하게 들리던 때였다.
그러던 것이 61년 군사혁명이후부터 서서히 붐이 조성되면서 62년도에는 시장이 본격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당시 증권거래소 주식인 대증권의 경우 4전에 불과하던 시세가 61년 11월에 액면가 5전을 넘어서더니 62년 1월말에는 15전을 상회하였다. 한전주의 경우 61년 11월에 액면 1,000원을 넘어선 후 다음달에는 2,000원으로 올랐다. 시세 상승으로 61년 14억 원에 불과하던 거래대금이 다음해인 62년에는 전년대비 14배나 폭증한 992억원에 달하여 시장의 힘을 과시하였다.
증권시장이 단기간에 팽창하게 된 배경에는 다분히 인위적인 요소가 있었다. 이는 61년 5.16혁명이후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정치자금과 경제개발을 추진하기 위한 자금조달을 위한 일부 정치권의 암묵하에 이루어진 증권인사들의 의도적인 개입으로 훗날 규명되어 진다. 투기의 시작은 출처불명의 주식매입자금지원과 함께 정부 보유의 한전주식을 시세보다 낮게 수의불하 받은 일부 작전세력들이 '무상증자 실시' 등의 루머를 시장에 유포하면서 대증주와 한전주의 시세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리는 데서 출발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의 증권거래제도에 있었다. 당시 증권거래제도에는 보통거래와 청산거래가 있었는데, 이중 보통거래라는 것은 매매계약을 체결한 다음날에 거래소를 통하여 결제함이 원칙인데, 결제대금에 해당하는 이자만 내면 2개월간 결제를 연기할 수 있고 또 반대매매가 가능했다. 따라서 거래가 체결된 뒤에 주식을 산 사람이 대금을 결제하지 않더라도 거래소가 이를 대신해 결제를 해주고 매수자는 이자만 부담하면 되었다.
당시 증권시장에서는 주가가 매일 오르는 상황이어서 몇 푼 안 되는 이자가 문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투기를 조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거래소는 매도자금을 결제해야 하기 때문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으나, 실제로는 이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급기야 막대한 거래량에 따른 자금난으로 인하여 증권회사의 수도결제가 불가능하게 되자, 정부에 긴급자금을 요청하여 간신히 증권파동은 면하였다.
그리고 급한 불을 끄기 위해 거래소 증자를 통하여 결제자금을 마련하기로 결의하였다. 1962년 3월말에 4천만원의 증자로 자본금이 1억원이 된 거래소는 그 해 4월 다시 4억원의 증자를 결의하였다. 4월의 증자로 인한 발행주식수 80억주 중에서 70억주는 기존 주주에게, 1천만주는 종업원에게 액면으로 나누어주고 나머지 9억 9천만주는 액면가 5전의 29배인 1원 45전이라는 높은 프리미엄으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공모하였다.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대증주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당시 각 증권회사와 은행의 청약창구에는 부근 여관방에서 잠을 설친 청약인파가 이른 새벽부터 몰려들었으며, 청약창구 부근의 여관에는 빈방이 없어서 웃돈을 주어야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까 그 때의 열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청약은 예정대로 이루어졌고, 이후 6월에는 구주 1주당 2주의 비율로 무상증자를 실시하기로 함에 따라 거래소 자본금은 2월말의 6천만원에서 15억원으로 불과 4개월만에 25배나 늘었다. 한편 5월 22일 대증주의 공모가격이 1원 45전으로 결정되자 대증주의 거래량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는 거래소 대주주가 된 매수측이 높은 가격에 책정된 공모주의 원활한 소화를 위하여 더욱 시세를 높이는 작전을 구사한 반면에 매도측은 거래소 증자납입을 마치고 나면 증권시장의 자금이 고갈되어 주가가 폭락할 것이라고 예상하여 투매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5월 한달의 거래대금이 252억원이나 되었는데, 이 거래대금은 거래소 개설이래 6년 동안의 총 누적거래대금 274억원에 육박할 정도였으니 그 과열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매도측의 대량투매와 매수측의 고가매입은 결국에 증권시장을 파동의 함정으로 몰아넣었다. 매도측이 5월 25일부터 31일까지 내어놓은 매물은 모두 62억원으로 5월말의 수도결제를 책임지고 있는 거래소에서는 수도결제자금 부족분 18억원을 재무부에 요청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한 매수측은 결제대금중 25억원을 거래소에 납부하지 못하게 되었다.
금융통화운용위원회에서는 5월 30일의 18억원에 이어 6월 1일 또 다시 10억원을 지원하기로 함에 따라 5월말의 수도결제는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되었지만, 이로 인해 거래소는 1원33전6리라는 높은 가격으로 대증주 7억4천8백50만주를 인수하게 되어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입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액에 달하는 은행부채는 고스란히 남게 되었다. 시장붕괴의 위기를 느낀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는 증권시장수습에 관한 긴급지시를 내리게 되었다.
골자는 그때까지 거래소가 융자했던 대증주 17억2,500만원 등 총 18억9천만원에 해당하는 증권을 거래소가 인수하는 내용으로, 거래소의 자사주 보유는 더욱 증가하였다. 거래소의 자사주 인수로 증권파동은 일단 마무리되었으나 사회에 미친 영향이 워낙 컸고 증권시장이 불공정하게 운영되었다는 여론이 비등해지자 6월 13일에는 최고회의 의장의 긴급명령에 의해 특별감사단이 구성되었으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얼마동안의 시간이 흐른 후인 1963년 2월에 당시 중앙정보부에 소위 '4대 의혹사건'의 하나로 5월 증권파동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가 이루어져, 매수측 증권회사 주동자 일부와 당시의 재무부장관, 거래소 이사장, 임원 등 14명이 특별범죄처벌에 관한 임시조치법 위반으로 기소되었으나 의혹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군사법정의 판결이 내려져 전원이 무죄선고를 받았다.
일부 정치권인사와 관계, 증권업 종사자 등 3자가 야합함으로서, 우리나라 증권 역사상 가장 큰 오점을 남긴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는 이 파동으로 인하여 우리나라 증권시장의 발전은 10년 이상이나 늦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충격의 여진은 컸으며, 특히 대증주 공모 당시 액면 5전짜리를 1원45전에 받았던 사람들이 다음 해 2월말 경에는 2전대 마져 무너져 투자자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입혔다.
출처 : http://bbs.kiwoom.com/ivsthelp/StockStory2/allbody.jsp?num=7&tnum=66